티스토리 뷰
목차

계약서 한 장을 앞에 두고 '대충 괜찮겠지'라며 서명을 서두른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제가 읽지 않고 넘긴 조항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난 뒤,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줄 법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 작품입니다.
줄거리와 부림사건, 그 시절 법정이 감추려 했던 것
영화 <변호인>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냥 '법정 드라마'일 거라 생각했는데, 장면 하나하나가 실화의 무게를 그대로 싣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합니다. 부림사건이란 1981년 부산에서 공안 당국이 학생과 교사 22명을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해 고문하고 기소한 실제 사건입니다. 이른바 '부산의 학림사건'을 줄여 부른 이름으로, 학생들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이 공산주의 혁명 준비로 둔갑한 것입니다. 당시 신군부 정권 초기의 공안 통치가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주인공 송우석(송강호)은 처음부터 사회 정의를 외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졸 출신으로 백도 없이 판사직에 올랐지만, 돈이 되지 않자 변호사로 전업해 부동산 등기 업무로 큰 성공을 거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여기서 부동산 등기란 토지나 건물의 소유권 변동 사실을 공적 장부에 기재하는 법률 행위를 말하는데, 1980년대 초 대한민국의 부동산 열풍 속에서 이 업무가 얼마나 수익성이 높았는지를 영화는 생생히 보여줍니다.
제가 이 인물에 공감이 간 이유는, 그가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출산할 때 병원비를 마련하려고 막노동을 했고, 고시 공부하던 책을 팔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가 훗날 자신이 막노동하며 지었던 아파트 803호를 구매하고, 7년 전 식비를 못 내고 달아났던 국밥집에 다시 찾아가 돈을 지불하는 장면은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그런 송우석이 변호를 맡은 것은 국밥집 아들 진우가 체포되면서부터입니다. 진우는 독서 모임에 참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 불법감금과 가혹 행위, 즉 고문을 당합니다. 고문이란 수사 기관이 자백이나 진술을 강요하기 위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로, 현행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이를 명백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1981년에는 그 원칙이 철저히 무시됩니다.
멀쩡하던 진우가 온몸에 멍자국을 남긴 채 구치소에 앉아 있는 장면, 그 앞에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뻔한 어머니 순애(김영애)의 표정을 보면서 제가 직접 느낀 건 분노보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법이 있어도 그것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그 사실이 화면을 통해 천천히 눌러왔습니다.
- 부림사건: 1981년 부산, 독서 모임 학생·교사 22명 영장 없이 체포 및 기소
- 불법감금과 고문으로 받아낸 허위 자백이 공소 사실의 근거로 사용됨
- 당시 공안 통치 구조 속에서 적법절차 원칙이 전면 무시된 사례
- 이 사건의 변호 경험이 노무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됨
인권변호사의 선택이 제게 남긴 질문들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인권변호사'라는 단어를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무게가 달리 느껴졌습니다.
인권변호사란 단순히 법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가 권력이나 사회 구조에 의해 기본권이 침해된 개인의 편에 서서 법적으로 싸우는 역할을 하는 변호사를 말합니다. 여기서 기본권이란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는 자유와 권리를 뜻하는데,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적법절차를 통한 재판받을 권리 등이 대표적입니다.
영화 속 송우석이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한 건 아닙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이야기로 들립니다. 누군가는 큰 결심을 하고 방향을 바꾸지만, 그는 그냥 외면할 수 없어서 발을 들인 것이고, 그 발 한 걸음이 전혀 다른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차동영 경감(곽도원)이 법정에서 보이는 태도는 특히 불편했습니다. 그 시대 공안 권력의 카리스마가 단지 강렬함이 아니라 '당연함'으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적법절차를 대체하는 논리로 쓰이는 구조, 저는 그것이 영화가 가장 날카롭게 건드리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약서를 앞에 두고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경험을 돌아보면, 그건 결국 '제 권리를 제가 확인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진우의 상황과 일상적인 계약 문제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는지, 그 권리가 지켜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태도만큼은 이어진다고 느꼈습니다. 중요한 계약이나 행정 절차를 앞에 두고 제가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하니까라는 이유만으로 서명을 서두른 적이 꽤 있었는데, 그 습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단단해졌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정보를 전달하는 입장이 될 때의 태도도 생각해봤습니다. 상대방이 불리한 조건을 놓치지 않도록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결국 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입니다. 오달수가 연기한 동호가 사무장으로서 사무실을 챙기는 장면들이 자잖고 유쾌한 듯 보이면서도, 그 자리에서 꼼꼼하게 챙기는 역할이 없었다면 송우석의 변호가 제대로 굴러갔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변호인>은 실화인가요?
A.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1981년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며, 주인공 송우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제 행적과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다만 영화적 각색이 더해진 픽션 작품입니다.
Q. 부림사건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가요?
A. 부림사건은 1981년 신군부 정권 초기, 부산의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교사 등 22명을 영장도 없이 체포해 불법감금하고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낸 사건입니다. '부산의 학림사건'을 줄여 부른 이름입니다. 이 사건의 변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됩니다.
Q. 영화에서 송강호 외에 어떤 배우들이 나오나요?
A. 사무장 동호 역에 오달수, 진우 어머니 순애 역에 김영애, 공안 경감 차동영 역에 곽도원이 출연합니다. 특히 김영애의 모정 연기와 곽도원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영화의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핵심 역할을 합니다. 아들을 지키려는 어머니와 그 앞을 막아서는 공권력의 대비가 영화 후반부의 감정적 무게를 결정합니다.
Q. 적법절차란 무엇이고 영화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A. 적법절차(due process)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처벌을 내릴 때 반드시 법이 정한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영장 없는 체포,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정당한 변호 기회 박탈 등은 모두 이 원칙의 위반입니다. 영화 <변호인>은 이 적법절차가 무너진 시대를 배경으로, 그 원칙을 되찾으려는 한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Q. 이 영화, 지금 봐도 의미가 있나요?
A. 제 경험상 이건 시대물이지만 지금도 충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법이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가,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법정 드라마를 좋아하시든 아니든, 한 번쯤 법과 권리를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면 지금 봐도 충분히 무게감이 있는 작품입니다.
결론
영화 <변호인>을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장면은 법정이 아니었습니다. 7년 전 도망쳤던 국밥집에 다시 돌아가 밥값을 치르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게 이 사람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빚진 마음이 그를 다시 움직였다는 것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법이 있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구조에 의문을 품는 것, 자신의 권리가 어디에 적혀 있는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요한 계약이나 절차를 마주할 때, 제가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릴 것 같습니다.